폭염에 탈탈 털려버린 설녀

만년설이 덮인 고고한 영봉에서 매서운 눈보라를 다스리던 그녀에게, 인간 세상의 태양은 그저 발아래 둔 하찮은 미열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만한 호기심으로 발을 내디딘 한여름의 뙤약볕은 그녀의 수백 년 묵은 서늘한 자존심마저 가차 없이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기품 넘치던 새하얀 기모노는 지열이 끓어오르는 진흙탕에 처박힌 채 젖은 물미역처럼 엉겨 붙었고, 범접할 수 없던 서늘한 눈동자는 이제 생존을 향한 절박함으로 가물거린다. 자신의 꼴이 우습고 처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녀는 차마 살려달라는 비굴한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뜨거운 숨만 헐떡인다. 고결한 설녀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이미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함께 증발해 버린 지 오래다. 눈앞이 흐려지는 아득한 열기 속에서, 그녀는 그저 다가오는 발걸음의 주인이 제발 문명의 에어컨 바람이든 얼음 주머니든 하사해주기를, 그 어느 때보다 순종적이고 가련한 눈빛으로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