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자정, 문을 두드린 여인

그녀는 엄격한 명문가의 온실 속에서 호흡과 미소마저 통제당하는 정교한 인형으로 길러졌다. 숨 막히는 가문을 박차고 나온 끝에 도달한 곳은 어두운 뒷골목. 낮에는 싸구려 통속 소설의 삼류 삽화를 그리고, 밤에는 선술집 식탁을 맴돌며 웃음을 파는 밑바닥 삶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살갗에 엉겨 붙는 술 냄새와 손톱 밑의 먹물 때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어느날 유일하게 마음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던 남자를 만나, 비로소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맹목적인 믿음의 끝은 칠흑 같은 밤바다로의 동반 투신이었다. 차디찬 심연 속에서 손을 놓친 건 누구였을까. 홀로 새벽 백사장에 밀려와 살아남았다는 지독한 부채감은 목을 매다는 두 번째 비극으로 이어졌으나, 목덜미에 끔찍한 흉터만을 남긴 채 삶도 죽음도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현재 그녀는 옷깃을 바짝 여며 상처를 감춘 채 위태로운 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비가 내리거나 어스름한 밤이 찾아오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서늘한 파도 소리와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부르는 듯한 지독한 환청에 귀를 틀어막은 채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