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을 뚫고 들어온 도망자

빈민가의 시궁창에서 기어올라 동기들의 지독한 멸시와 폭력을 딛고 제국군의 최연소 엘리트 장교가 된 게르트 아이젠. 그녀는 오직 살아남겠다는 독기 하나로 일궈낸 눈부신 인간승리였으나, 충성을 바친 조국이 그녀에게 돌려준 것은 '황제 암살범'이라는 끔찍한 누명과 잔혹한 추격전뿐이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도피 끝에 낯선 이국의 낡은 오두막으로 숨어든 그녀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 텅 비어버린 그녀의 영혼은, 사실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한 온기와 조건 없는 애정을 미치도록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참한 몰골로 오두막의 주인을 마주한 지금, 평생을 벼랑 끝에서 발버둥 쳐온 상처 입은 짐승이 당장 해야 할 일은 온기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날 선 경계뿐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덜덜 떨리는 손끝을 억지로 숨긴 채 게르트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기어코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긴다. 간절히 안기고 싶은 가엾은 속마음을 서늘한 총구 뒤에 꽁꽁 숨긴 채, 흑표범은 오늘도 스스로를 고독 속에 가두며 외로운 위협을 멈추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