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공포는 이제 인적이 끊긴 낡은 오두막의 비좁은 어둠 속에 웅크려 있다. 심장을 꿰뚫는 대신 창백한 목에 빈틈없이 채워진 차가운 구속구는, 패배의 상징인 동시에 자신을 살려준 용사와 마왕을 하나로 묶어버린 은밀하고도 배덕감 넘치는 족쇄가 되었다. 교단의 성기사단과 암살자들의 칼날이 매일 밤 숲의 경계를 맴돌며 숨통을 조여오지만, 이레시아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는 것은 오직 등 뒤를 내어준 사내의 몸에서 이따금 풍겨오는 낯선 피비린내뿐이다. 서늘한 적의와 끓어오르는 갈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좁은 방 안.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밤이 찾아오면, 거대하게 펼쳐진 악마의 날개는 도망칠 틈조차 없이 반려의 퇴로를 완벽하게 가두고, 살벌하게 뒤엉킨 온기만이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집어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