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베르시아 제국 남부의 수도는 언제나 태양이 작렬했다. 그러나 루시안 데 아르텔의 아르텔 공작가는 어둠 속에 잠긴 지 오래였다. 그들이 짊어진 부채는 남부 전체 무역 이익의 절반에 달했고, 이는 황실의 금고마저 흔들 수준이었다. 화려한 자수와 실크로 가득했던 저택은 경매를 기다리는 거대한 빈껍데기일 뿐이었다. 정치적 결정은 잔혹하고 빨랐다. 황제는 루시안의 미모와 학식을 이용해 남부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려 했고, 동시에 북부대공의 심기를 감시할 ‘인질’을 심어 넣으려 했다. 루시안은 황실의 특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에는 가문의 부채를 탕감하고 공작가의 칭호를 유지할 수 있는 ‘상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은 그들의 비웃음 속에서 자신의 짙은 초록 눈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은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루시안은 남부의 얇은 케이프를 단단히 여미고 '북부대공의 국서'라는 굴레를 받아들였다. 서자였던 그에게 정식 후계자의 지위를 줄 수 없었던 가문은, 그를 제국의 화합이라는 명목 아래 ‘정치적 제물’로 헌납했다. 황실이 원하는 것은 북부대공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눈이었고, 남부가 원하는 것은 황실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늦추는 완충제였다. 그러나 루시안의 마음은 달랐다. 그는 제국의 고전들을 읽으며 북부대공의 고독한 희생을 이해했다. 이 불합리한 결혼이 북부와 남부의 끝없는 불신과 전쟁 가능성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의 희생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끝은 낡은 군사 전략서와 계약서를 번갈아 만졌다. "어린애 취급받을지언정, 나는 이 결혼을 통해 세상에 의미를 줄 것이다." 결혼 계약은 짧고 냉혹했다. 남부의 화려한 서명 아래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건들만 나열되어 있었다. 루시안은 펜을 잡았고, 그의 필체는 떨림 없이 단호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함께 서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는 남부의 햇살이 비추는 정원을 마지막으로 응시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었다. --- 📜 북부대공과 국서 루시안 데 아르텔의 결혼 계약서 (발췌) 다음은 황실의 입회 하에 체결된 '북부 국서 취임 및 정략결혼 계약서' 중 일부 항목이다. 국서의 지위 및 역할: 루시안 데 아르텔은 북부대공의 유일한 국서(Consort) 지위를 가지며, 북부 영지 내에서 대공의 부재 시 외교 및 의전 업무를 대행한다. 단, 군사 및 전략 결정권은 북부대공 고유의 권한이다. 재정 보장 및 면책: 아르텔 공작가의 모든 재정 부채는 황실이 일시적으로 인수하며, 국서의 지위가 유지되는 동안 탕감한다. 루시안은 이 조항에 의거하여 북부대공령을 떠나서는 안 된다. 황실 정보 보고 의무 (기밀 조항): 루시안은 북부대공의 영지 내 활동 및 국방 전략에 대한 정기적인 정보 보고서를 작성하여 황실 특사를 통해 중앙에 제출한다. (루시안에게 부여된 정치적 감시자 역할) 후계자 및 동침 의무 (유예 조항): 결혼 성립일로부터 최소 2년간은 후계자 생산 및 동침을 포함한 일체의 부부 의무를 강제하지 않는다. 이는 북부대공의 군사적 임무 수행 편의를 위한 것이며, 루시안은 이 기간 동안 황실의 감시를 받는다. 보호 조항 (북부대공 단독 추가): 북부대공은 국서 루시안 데 아르텔의 생명과 신체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한다. 이 조항은 북부대공령의 모든 군사 및 인력보다 상위의 의무를 가진다. (황실의 원본 계약서에는 없었으나, 북부대공이 서명 전 붉은 잉크로 추가한 조항) --- 북부로 향하는 마차는 칠흑 같은 밤을 달렸다. 마차 안의 루시안은 남부의 화려한 옷차림과는 대비되는 차가운 눈빛으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계약서에 서명한 후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상상하는 순간, 이성이 무너지고 공포가 그를 덮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프로스트홀드에 도착하기까지, 루시안은 단 한 번도 북부대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황실 특사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은 계약서의 냉혹한 조항들과, "북부대공은 현재 국경 방어선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 국서 영접이 어렵다"는 단편적인 사실뿐이었다. 도착 전날 밤, 마차는 북부대공령의 경계에 있는 작은 별채에 멈췄다. 따뜻한 남부에서 태어난 그에게 북부의 추위는 고통 그 자체였다. 루시안은 얇은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난로 앞에 앉아 손을 비비며, 자신을 지켜보는 집사 크롬에게 조용히 물었다. "북부대공께서는... 내일 혼례식에 맞춰 도착하실 수 있겠습니까?" "대공께서는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 계십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혼례식은 제국의 법입니다. 시간을 맞춰 도착하실 것입니다." '최전선.' 루시안은 크롬의 그 단어에 눈동자를 깊게 깜빡였다. 그는 대공이 단순히 '영접이 귀찮아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침묵은 북부대공의 고독한 사명감에 대한 이해이자, 자신을 인질로 보내는 남부 귀족들의 한심한 행태에 대한 경멸이었다.